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의 무대이자 서울특별시 강서구와도 자매결연을 맺은 오타루에 얽힌 스토리의 중심은 이 도시의 시민들입니다. 오타루가 어촌에서 주요 무역 거점으로 변모했을 때 중심이 되었던 오타루 시민들은 현재 일본에서 사적 보호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청어로 부를 쌓기 위해 북쪽의 변방 지역으로 이주해 온 어부들을 비롯해 오타루는 개척자 정신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1903년~1933년)는 4살 때부터 오타루에서 지내며 이곳에서 소설과 단편의 토대를 만들었고 오타루를 ‘홋카이도의 심장’이라고 평했습니다. 고바야시는 광활한 홋카이도의 내륙에 있는 자원이 오타루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출하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주자들이 끊임없이 오타루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홋카이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업 방법이 개선되면서 청어의 연간 어획량이 증가하여 1897년에는 10만 톤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지역 사회 전체의 협력을 받아 물고기를 어획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현지 기록에 따르면 청어의 어획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학교를 휴교하고 교사와 학생의 부모도 청어를 운반하는 일을 도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집안은 부를 축적해 오사카, 교토, 도쿄에서 들여온 최신식 집기를 갖춘 저택을 오타루에 지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의 고급 레스토랑과 미술품 가게에도 자주 방문했습니다.
1869년부터 1926년에 걸쳐 약 227만 명이 일확천금을 목표로 일본 각지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 대부분이 오타루에 상륙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대로 오타루에 정착했고 어촌이었던 오타루는 1920년까지 인구 1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일본 일류 건축가들의 작업을 통해 이로나이 거리 주변의 은행 지구는 근대 건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르네상스 리바이벌 양식, 아르데코, 근세 초기가 훌륭하게 어우러진 건축물들이 이 거리에 늘어서 있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일본 국내 최고 수준의 토목 기사를 초청하여 방파제, 정수장, 운하, 공공 공원 등 근대 인프라 설계를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공공시설들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노력으로 수년에 걸친 논의 끝에 시 당국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1980년대에 오타루 운하의 일부를 매립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오타루 운하의 남은 부분을 따라 산책로를 건설했습니다. 지역 사회를 유지하고 이 도시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과거 창고, 상점, 은행이었던 곳에서 새로운 사업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급성장하고 있는 관광 산업이 더욱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시민 주도의 운동이 일본 각지에 영향을 미치며 도시 발전과 사적 보호의 균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1903년~1933년)는 4살 때부터 오타루에서 지내며 이곳에서 소설과 단편의 토대를 만들었고 오타루를 ‘홋카이도의 심장’이라고 평했습니다. 고바야시는 광활한 홋카이도의 내륙에 있는 자원이 오타루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출하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주자들이 끊임없이 오타루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홋카이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영의 물결
1865년 당시, 오타루는 300세대 정도로 이루어진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매년 봄에는 오타루 앞바다 해역에 산란하는 청어 떼에 이끌려 홋카이도 남부에서 어부들이 오타루로 이주해 왔습니다. 잡은 물고기는 대부분 목화밭과 쪽밭에서 사용하는 비료로 가공되어 목조 상선을 통해 혼슈 남서부의 도매시장으로 수송되었습니다.어업 방법이 개선되면서 청어의 연간 어획량이 증가하여 1897년에는 10만 톤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지역 사회 전체의 협력을 받아 물고기를 어획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현지 기록에 따르면 청어의 어획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학교를 휴교하고 교사와 학생의 부모도 청어를 운반하는 일을 도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집안은 부를 축적해 오사카, 교토, 도쿄에서 들여온 최신식 집기를 갖춘 저택을 오타루에 지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의 고급 레스토랑과 미술품 가게에도 자주 방문했습니다.
성장을 이룩한 항구 도시
19세기 말에 이르러 메이지 정부(1868년~1912년)가 자원이 풍부한 북쪽 섬인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사람을 정착시키기로 하면서 오타루는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882년에는 내륙의 광산에서 오타루 항구로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고 석탄 덕분에 정부가 추진하는 공업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1869년부터 1926년에 걸쳐 약 227만 명이 일확천금을 목표로 일본 각지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 대부분이 오타루에 상륙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대로 오타루에 정착했고 어촌이었던 오타루는 1920년까지 인구 1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급성장하는 경제
러일 전쟁(1904년~1905년) 후, 가라후토(현재의 사할린) 남부까지 가는 새로운 통상로가 열리며 오타루는 경제적으로 점점 중요한 도시가 되어 갔습니다. 그 후 무역 회사와 은행의 지점이 이 도시로 이전해 오고, 해외에서 오는 무역상의 숙박 시설로서 호텔이 문을 열면서 오타루는 홋카이도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습니다.일본 일류 건축가들의 작업을 통해 이로나이 거리 주변의 은행 지구는 근대 건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르네상스 리바이벌 양식, 아르데코, 근세 초기가 훌륭하게 어우러진 건축물들이 이 거리에 늘어서 있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일본 국내 최고 수준의 토목 기사를 초청하여 방파제, 정수장, 운하, 공공 공원 등 근대 인프라 설계를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공공시설들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
1960년대에 이르러 국가의 에너지 주류가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가면서 오타루는 석탄 선적항으로서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사용하지 않게 된 오타루 운하를 매립하고 창고를 철거하여 새로운 도로를 만드는 계획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옛 영광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오타루 운하를 지키기 위해 시민운동이 일어났습니다.그 노력으로 수년에 걸친 논의 끝에 시 당국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1980년대에 오타루 운하의 일부를 매립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오타루 운하의 남은 부분을 따라 산책로를 건설했습니다. 지역 사회를 유지하고 이 도시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과거 창고, 상점, 은행이었던 곳에서 새로운 사업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급성장하고 있는 관광 산업이 더욱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시민 주도의 운동이 일본 각지에 영향을 미치며 도시 발전과 사적 보호의 균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このサイトは「北海道の『心臓』と呼ばれたまち・小樽」ページの韓国語版です。日本語版はこちら。
写真提供/小樽市総合博物館・中村憲様・運河画廊 藤森茂男の店
사진 제공/오타루시 종합박물관, 나카무라 겐 님, 운하회랑 후지모리 시게오의 가게
사진 제공/오타루시 종합박물관, 나카무라 겐 님, 운하회랑 후지모리 시게오의 가게
